9화 - 모래폭풍 속의 사도
(약 6,200자 분량 · 24 h KST 기준 서술)
0. 붉은 비 이후, 첫 번째 아침
06 : 45 · 남대문 광장
라그나 실드 재동기화가 성공한 지 40분. 구겨진 철제 펜스와 불탄 케이블이 도심에 드문드문 널려 있었지만, 하늘은 태풍 뒤처럼 투명했다.
서울시는 “도심 배전선 과부하” “특이 안개” 정도로만 긴급 공지했고, 인근 교통로는 4시간 만에 통행을 재개했다.
민지와 레이븐은 응급호버트럭 뒤칸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민지가 입술을 떨며 레이븐 팔을 툭 건드렸다.
“기억해. 현중이한테… 라면 값.”
레이븐은 눈가를 가늘게 접었다.
“네가 잊어도, 내가 기억하지.”
그러나 속으로는 얼음장 같은 불안이 배어 있었다. 민지의 기억 블랭크가 점점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오더 잔당 수색보고
08 : 10 · 아르카이아 본부 브리핑룸
· 섀도우 오더 투항 27명
· 오블리비언 나이츠 생포 3구
· 카시엘 본체 · 파생 코어 → 행방불명
조하령 박사는 커튼을 걷자마자 중간 보고서를 던졌다.
“남대문 지상·지하 VR로그 모두 확인했지만 카시엘 실체 좌표는 02 : 58 이후 사라졌습니다.
σ-플레이트가 ‘누락 0.08%’ 상태로 남아 있어요. 그게 새 네트워크 열쇠가 됐을지도 몰라요.”
로건 지부장은 진통제 캡슐을 두 알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 0.08%가 카시엘 탈출 경로라는 얘기군. 우리 편 열쇠를 들고, 지금은 어디서 또 인형을 짜고 있겠지.”
2. 민지, 기억 블랭크 확대
10 : 05 · 본부 의무동 안락실
민지는 심전도 신호 대신 Theta-Δ 파형이 들쑥날쑥했다.
스코필드 진정술사가 가느다란 침을 자창혈(刺窓穴)에 꽂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조 후유증이 뇌간으로 번졌습니다. ‘데칼코마니 현상’ 이라고 부릅니다. 뇌의 기억 회로가 거울처럼 겹쳐서 자기 자신을 덮어쓰는 증상. 당장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민지는 화사하게 웃으면서도, 방금 전 스코필드 이름을 또 잊었다.
레이븐이 손을 잡자, 손등 흰 까마귀가 살짝 빛났다.
“네 각인이… 나 대신 기억해 줄까?”
레이븐은 고개를 떨궜다. “약속할게. 방법을 찾을 때까진 내가 네 기억 창고가 되겠다.”
3. 배신자 색출, 그리고 공백 보고서
13 : 20 · 지하 4층 소규모 청문실
성수·은평 노드를 뒤집은 내부 공작자의 흔적을 추적하던 스프링·하운드가 하나의 공백 보고서를 발견했다.
보고서 번호 L-13-62. 결재라인에는 ‘임시 사무감독’ 도장만 쿡 찍혀 있었다.
그리고 하단에는 무색 잉크로 희미하게 아르카이아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로건 지부장님 사인 날짜보다 6시간 앞선 문서야.”
하운드가 이를 갈았다.
“내부 인원이 로건 서명을 그대로 스캔 떠서 ‘가짜’ 우회승인 올린 거지.”
조하령이 루미팬 불빛으로 보고서를 비춰 보더니, 종이 뒤쪽에 낡은 양각 하나를 찾았다.
< I - 014 >
“14번 라벨… 2007년 ‘신의 책갈피 작전’ 때 도주한 연구조교 번호예요. 기록상으론 작전 중 전사 처리.”
스프링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아르카이아 자체가 20년 전부터 자로 잰 그림자를 끌고 다니고 있단 건가?”
4. 모래폭풍의 사도, 낙타를 걷어차다
18 : 45 · 카자흐스탄 – 신장(新疆) 접경, 타클라마칸 서부
누구도 사람이 있을 거라 믿지 않는 모래바람 속에서, 검은 후드를 쓴 사내가 낙타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낙타는 끼익 울더니 모래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사내는 투박한 위성폰을 열고 단문(短文)을 날렸다.
TO: 카시엘
MSG: “σ-결손 0.08 % 확보. Mimesis Project 2단계 진입.”
그는 후드를 벗으며 고개를 들었다.
서양인도 아니고 동양인도 아닌, 흰 색채가 살짝 비치는 이목구비.
그리고 목덜미엔 작게 아르카이아 새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레거시(legacy)는 무덤에서 피어난다.”
사내가 바닥 모래를 한 움큼 잡아 올리자, 붉은 결정 파편이 섞여 반짝였다.
“남대문 하늘만이 결정이 아니지. 사막에도 비는 온다.”
5. σ-플레이트의 숨은 조항
서울 본부 · 22 : 10
레이븐은 연구동 B-5에서 σ-플레이트를 유리관에 넣은 뒤 하령 박사와 코딩 로그를 검토하고 있었다.
해석키 3단계를 넘자, 숨겨진 명령어 열이 튀어올랐다.
SUB-CLAUSE σ-04-β
“키-플레이트 σ는 _복수의 동조자_ 가 접속할 때
‘새로운 조율 권한’을 자동 생성한다.”
└ 추가 조건: **동조자 내 한 명 이상 ‘기억 정합 불안정’** 상태일 것
레이븐이 놀라 하령을 바라봤다.
“‘기억 정합 불안정’이면… 민지가 조건이 되잖아?”
하령이 손을 부르르 떨었다.
“σ-플레이트는 카시엘이 아니라 원 설계자가 만든 물건이야. 동조자가 기억을 잃어갈수록 σ-플레이트가 새로운 패치 를 연다.”
레이븐 눈앞에서 σ-플레이트 라인이 은빛에서 백금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붉은 각이 0.08 % 만큼 비어 있었다.
카시엘이 훔쳐간 그 조각—사막 어디선가 반응할지도 모른다.
6. 두 얼굴의 선(線)
23 : 55 · 본부 옥상, 도심 야경
새벽 전야, 민지는 가느다란 격납고 난간에 서서 잠든 듯 눈을 감고 있었다.
하운드가 말없이 다가와 담요를 덮어 주었다.
민지는 눈을 떴지만, 하운드를 알아보지 못한 듯 시선을 헤맸다.
“누…구?”
하운드는 잠시 굳어 있다가, 차분히 대답했다.
“하운드. 네가 늘 무식하다고 부르던 그놈이다.”
민지는 흐릿한 웃음을 지었다.
“무식…했나?”
레이븐이 뒤에서 다가와 조용히 손등을 맞댔다.
각인이 한 번 맥동하자, 민지의 동공이 잠시 초점을 찾았다.
“라면… 값.”
“알아.”
모래폭풍이 자는 사막까지 부는 냄새처럼, 도시 밤공기엔 아직 붉은 비 잔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레이븐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σ-플레이트, 기억 불안정, 그리고 0.08 %—모든 퍼즐이 사막으로 향해.”
그때, 흰 까마귀가 빙그르르 날다가, 남대문 방향이 아닌 서쪽 하늘—‘실크로드’ 끝 모래 산맥 쪽을 가리켰다.
앞날의 폭풍이 그곳에서 막 시동을 거는 듯, 별빛 하나가 깜빡이며 떨어졌다.
7. 엔드 카드 ― 서쪽에서 불어올 재(災)
00 : 00 +1d (T-0 h, NEW COUNT)
전 상황판엔 붉은 시간이 사라지고, 대신 금색 타이머가 점멸했다.
[ NEW THREAT SANDWALKER ]
ETA: 96 h
LOC: Taklamakan Basin & Silk-Road Node
로건 지부장이 회의실에 들어와 담배를 꺾었다.
“사막에서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라도, 96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
레이븐이 민지를 바라봤다. 민지는 눈을 감았지만, 그의 손바닥을 꼭 잡고 있었다.
“좋아. 이번엔 우리가 먼저 간다.”
흰 까마귀가 옥상 난간 아래로 내려앉았다.
차가운 달빛 밑에서, 칼날 같은 날개가 모래폭풍을 예고하듯 파르르 떨렸다.
10화 예고
● 미지의 사막 계획 “Sandwalker”: 붉은 비 잔재 + 모래 입자 → 거대 거울포식수(沙食獸) 제조?
● 레이븐·민지·스프링·하운드, 카자흐 국경 비밀 활주로로 잠입.
● σ-플레이트 0.08 % 결손 조각을 추적해, 사막 심층에 숨은 낡은 아르카이아 실험 탑 발견.
● 민지의 기억 붕괴가 한계에 달하고, σ가 제시하는 “기억 백업 의식” 은 오히려 영혼 분리 위험을 내포.
● 사막 폭풍 속 모래골렘과 첫 교전, 그리고 카시엘 본체의 실루엣—
지금까지의 서울 전투는 서곡에 불과했다.
10화, “사막의 거울탑”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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