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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븐: 광휘의 종언

6화 - 라그나 실드

by st공간-레이븐 2025.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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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 라그나 실드

편집자 주: 본 장은 약 6,200자 분량입니다. (문단 구분상 숫자 표기는 모두 24시간제·KST 기준)


0. D-72 h 카운트다운 개시

서울 종로구 아르카이아 임시 사령실.
05:03 ─ 새벽이 막 기척을 드러낸 직후, 거대한 전광 세그먼트에 숫자 71 : 59 : 57이 점등되었다.
「CODE NAME : RAGNARØK-SHIELD
붉은 비 예고까지 남은 정확한 시간―72시간의 초침은 그 자체가 폭탄의 뇌관이었다.

“72시간 전까지 지상·공중·지하를 전부 방어막 ‘라그나 실드’로 봉합한다―이게 상층부 최종 승인안이다.”
로건 장 지부장은 거칠게 파일을 덮었다. 은빛 콧수염 끝에 초초(焦躁)가 걸렸다.
“조건부 단서가 붙어 있죠.” 하령 박사가 차트에 형광 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 탄소·조도·습도 기반 공간 왜곡을 동일 분모로 묶을 것
─ 단, _붉은 결정_의 잠재 진화 변수를 실시간 반영할 것
─ 미달 시 ‘라그나 실드’ 전면 무효

“한마디로 실패하면 전부 끝장이라는 얘깁니다.” 하령의 말에 회의실 공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1. 붉은 결정, 첫 관측

05:50, 서울 마포구 월드컵대교 상공.
기상청 고층기류 관측 드론 G-241이 원격 영상 한 컷을 전송했다.
재킷을 뒤집어쓴 듯한 붉은 입자띠가 북서풍과 맞물려 서쪽 경계를 움켜쥐고 있었다.

[영상 로그]
고도 1,200 m, 3 µm급 결정 다발
파장 520 nm·580 nm 이중 발광
입자 주기 1.7 s – 하강 예비 패턴

스프링이 안색을 바꿨다.
“입자 밀도 현재 2%. 48시간 남으면 서울 상공 ‘세로 토네이도’ 불러올 확률 62%.”
“그 얘긴 곧 대기층이 통째로 거울면처럼 뒤집힐 수 있다는 말이죠.” 민지는 흐린 눈동자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레이븐은 조용히 손등 각인 위 발열 패치를 눌러 꺼졌다 켠 채, 씁쓸히 탄식했다.
‘72시간도 장담 못한다…’


2. 다섯 곳의 ‘흡혈 의식’

08:10,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접수된 신고 열 건.
모두 “지하철 변전실 안에 녹슨 사슬이 자라났다”는 기괴한 내용이었다.
아르카이아 정보망은 짧은 수사 실(실시간 실효 연산) 끝에 일치 패턴 다섯 군데를 표시했다.

  1. 상왕십리 2호 변전소 ― 심도 30 m, 도시가스관 교차
  2. 합정 IT타워 옥상 ― 위성통신 안테나, 직경 6 m
  3. 성수 수직철탑 44-B ― 양방향 고주파 집중 부스팅
  4. 구로 차량기지 정거장 ― 레일 스틸노트 1.2 km
  5. 은평 새절하수관 관측구 ― 면적 3,100 ㎡ 통합 맨홀

공통 요소는 ‘금속 계열 잉여전위(剩餘電位) + 미세 붉은 결정 응집’.
민지는 숫자 배열을 보자마자 경악했다.
“저건 전형적인 흡혈 의식 전개판이에요. 금속 전위로 도시 혈관을 만든 다음, 붉은 비가 떨어지면 한 번에...”
“서울 전체가 필요 없는 ‘혈관’으로 연결돼 버린다.” 레이븐이 뒤를 이었다.
하운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이라도 맨홀 한 곳씩 봉인해 버리면?”
하령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입자가 파이프 자성층까지 스며든 이상, 물리적 덮개만으론 역류를 못 막습니다.”


3. 라그나 실드 핵심 로직

조하령이 칠판 가득 수식(數式)을 써 내려갔다.

LAGNA-SHIELD = Σ(각인 루트 ϕᵢ × Δ공간밀도 × Λ시간상수) – G-코어 동조상태 ≤ 0
핵심은 ‘도시 혈관’보다 0.046초 빠른 시간상수로 마력 반사를 걸어 버리는 것.
이를 위해선 루트 ϕᵢ, 즉 다중 봉쇄 주술 회로를 5개 의식 장소 밑바닥에 새겨야 한다.
“각인 깊이 최소 42 cm, 룬선 총 길이 9 km.”
스프링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5군데 동시에 판 뜯고 42 cm씩 파면 확실히 못 들키죠...? 현대판 땅굴 작전이네요.”

로건 지부장이 두루마리 도면을 펼쳤다.
“인부와 장비는 국정원 보안레벨 𝗕 인력으로 위장하기로 했다. 낡은 설치통신로 교체작업 명목.”
민지가 빠르게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인부가 룬선을 제대로 새길 수는 없어요. 연마(硏磨) 각도가 0.3°만 삐뚤어져도 반사가 깨져요.”
“그래서…” 로건이 레이븐에게 시선을 넘겼다.
동조자인 네가 정점(頂點) 참관을 맡아야 한다.


4. 민지, 후유증

첫 동조 이후 민지는 하루에도 두 번씩 이명(耳鳴)과 편두통에 시달렸다.
오후 12:14, 지부 의무실.
S-class 진정술사 스코필드가 집중금침(禁針)으로 이명 포인트를 누르자, 민지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스코필드가 고개를 저었다.
“동조 잔류파가 일반 통각 세포보다 심층 청각핵을 먼저 건드리고 있어요. 퀸케 칵테일로 당장 4시간밖에 못 버팁니다.”
“4시간씩 72시간이면 스무 번은 맞아야겠군요.”
민지는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조금 비틀거렸다.
스프링이 곁에서 나직이 물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도 출동은 해야 해.”


5. 현장 투입 ― 첫 번째 혈관

18:05, 상왕십리 2호 변전소.
국정원 위장작업반 ‘K-Ray’가 케이블 드럼을 끌고 들어오는 동안, 레이븐·민지·하운드·스프링은 원반형 콘크리트 바닥을 3등분으로 커팅하고 있었다.
몰래 가져온 진동 룬커터가 섬광 없이 석재를 갈아내자, 시커먼 바닥 속에서 이미 새까만 사슬이 숨어 있었다.
“붉은 결정이 장력(張力)을 따라 뿌리내렸네.” 하운드가 이를 악물었다.
“최소 침투 깊이 35 cm. 다행히 룬선 각인 42 cm면 그 위에 덮을 수 있어.” 민지가 망치와 정(鐵釘)을 꺼냈다.
챙! 챙!
금빛 불꽃이 튀며 돌먼지를 덮었다.

레이븐은 손등 각인을 전극으로 삼아 룬선에 에테르 잉크를 흘려 넣었다.
초점 시야가 흐려지는 순간마다 ‘코어 목소리’가 흘러들었지만, 단호히 무시했다.
(그래, 네가 문이 되라… 아니, 아니.)
정신을 붙잡은 채, 그는 극도로 미세한 필압으로 마지막 곡선을 완성했다.

<ϕ₁> 그려짐.
바닥을 덮는 청람빛이 번쩍이며, 사슬이 순간 얼어붙었다.
민지가 빠르게 덮개를 끼웠다.
“현장 A 완료.”
“네 군데 남았다.” 레이븐이 숨을 골랐다.
74시간 → 68시간.


6. ― 나이츠의 새로운 카드

21:20, 성수 수직철탑.
고공작업대가 오를수록 바람이 거세졌다.
철탑 위 ‘흡혈 의식 원’은 사슬 대신 붉은 결정 알갱이가 안테나 전류를 먹고 자라고 있었다.
하운드가 쇠사슬 난간에 케이블을 걸며 외쳤다.
“랩핑 각도 45°! 바로 각인한다!”
스프링이 밑에서 드론 조종으로 외부 경계망을 하던 중 경보음을 들었다.
“인근 120 m 무기 감지! …오블리비언 나이츠 경량 기체 네 기 접근!”

레이븐은 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며 이빨을 악물었다.
“적 구조 파악!”
― 그러나 그 순간, 하긴 느낀 적 없는 푸른 불꽃이 철탑 아래서 올라왔다.
검은 망토를 걸친 나이츠 병사가 아니라, 라는 휘장을 단 푸른 기사(靑騎士).
민지가 낮게 외쳤다.
“파생 개체… 아랫등급이 아니라 옆등급이야! 붉은 비 준비를 위해 신형을 만든 거야!”

푸른 기사는 손짓 하나로 전파를 굽히며, 철탑 전류를 한꺼번에 대지로 보냈다.
퍼엉! 변압기가 터지고, 레이븐 일행의 작업대가 흔들리며 기우뚱했다.
금속 와이어가 끊어지는 소리,
민지가 가슴이 철렁해 고개를 들었다.
레이븐이 몸을 날려 하운드를 붙잡았지만 중심은 이미 공중.

3 m 추락. 꽝!
허리 높이 난간에 겨우 걸려 아슬아슬 매달린 두 사람.
광선블레이드가 난간 위를 스쳐 갔다.
레드 라이트, 이어 푸른 러쉽.


7. 칠흑과 청람, 교차로

레이븐이 AR-X9을 뒤로 던지듯 겨눴다.
첫 버스트가 청기사 헬멧을 스쳤다. …효과 없음.
청기사 몸을 휘감은 전파 장막이 모두 흡수.
나이프도, 총도, 화염도, 전류 에 걸리는 건 전부 무력화됐다.

“도시 전파를 먹어 치우는 요괴라고!” 스프링이 단말기를 내려 던졌다. 5 GHz도 2 GHz도 다 먹통.
민지는 망치를 움켜쥐고 슬쩍 비틀린 정신을 다잡았다.
Benjaculo!”
손끝에서 새파란 루나 스파크가 튀어 나가 전파 장막에 파고들었다.
기세 좋게 들어갔지만, 장막은 반점처럼 번져 흡수.

하운드가 부서진 난간을 밟으며 전방 롤링.
건틀렛 주먹이 청기사 옆구리를 너덜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사는 포식한 전력을 반사하듯 전기광을 폭발시켰다.
하운드의 보디슈트가 25만 볼트 쇼크로 따닥따닥 타들어 갔다.
“큭…!”

레이븐 시야가 검은 점으로 뒤덮였다. 이대로라면 작업 자체가 좌초된다.
그때, 캐니스터 속 G-코어 파편 잔향이 손등을 짜릿하게 훑었다.
『전파 장막은 전자共鳴이다. 역공진은 0.135° 위상차.』
릴레이 데이터를 머릿속에 불도장 찍듯 박아 넣는 낯선 음성.

“민지 씨―위상차 0.135°!”
민지가 즉각 알아듣고, 한 손에 빨간 잉크병을 잡아 공중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잉크판이 열리자, 늦은 저녁 달빛이 거꾸로 달라붙었다.
“Phase Shift : minus point one three five!”

청기사 장막 위로 푸른 빛이 뒤집혀 달라붙더니, 순간 접합부가 ‘짤깍’ 트위스트.
칵칵칵… 파직!*
고주파가 제 껍질 안에서 자가 충돌하며 번개 폭죽을 일으켰다.
청기사의 헬멧이 단숨에 뒤틀려 떨어져 나갔고, 빈 흑연 마스크가 들물처럼 부서지며 사라졌다.

레이븐은 그대로 AR-X9 방아쇠를 두어 발 더 당겼다.
심장부에 있던 붉은 미세 결정이 투둑 튀어 나와 허공에 멈췄다.
루나 스파크 잔류 자장이 결정 표면에 문자처럼 잠시 떠올랐다.

“R-17 T-minus 47:10”

“47시간 10분…?” 민지가 숨을 삼켰다.
“붉은 비 첫 낙하, 시각 업데이트.” 하령 박사 음성이 무전으로 들려왔다.
“시간당 오차 25%씩 줄어들고 있어.”
하운드가 난간에 기대며 씩 웃었다.
“결국 우릴 좀 더 다그치려고 저쪽이 친절히 카운트를 알려주는 거군.”


8. 남은 세 곳, 그리고 민지의 그림자

23:31, 구로 차량기지.
레이븐 팀이 세 번째 혈관을 봉인했을 때, 민지는 잠시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쉬다 그대로 쿨하게 쓰러졌다.
긴장 끈이 퍼뜩 끊어진 듯 심박이 불규칙.
스프링이 다급히 달려와 캐모마일 흡입 마법으로 안정시켰지만, 민지의 눈동자는 흐릿했다.
“맡겨줘.” 그가 굳게 잡은 손에서 땀이 흘렀다.

레이븐은 피 묻은 글러브를 벗었다.
“민지가 빠지면 의식 각인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그렇다고 강행하면 민지는 돌아올 수 없어.” 하령 박사의 경고가 날카로웠다.
레이븐은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코어 목소리’가 물음표를 던졌다.
“선택…”
그가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 버프는 내 동조로 대체한다. 코어를 더 깊이 쓰겠다.”
로건이 무전 속에서 맹렬히 반대했다.
“네 몸이 기폭제라면, 동조량이 한계치 넘으면 네 정체성도…!”
“그게 대혼을 늦출 수 있다면.”
레이븐은 AR-X9에 새 탄창을 끼웠다.
“남은 두 곳, 내가 끝내겠습니다.”

민지의 눈꺼풀이 간신히 떠졌다.
“기억해… 애초에 ‘라그나 실드’라는 이름… ‘라그나로크’에서 따왔잖아. 파괴 뒤 새벽… 새벽을 봐야… ….”
레이븐은 그녀의 손목에 남은 동맥맥박을 확인했다. 희미하지만 규칙적.
‘그래, 새벽을 보자.’


9. 라스트 스퍼트 ― 붉은 비 D-47 h

― 성수 철탑 교정, 완벽 각인 (D-47 h 02 m)
― 은평 하수관 관측구, 세로 9 km 마지막 봉인 (D-46 h 10 m)

레이븐은 손등 각인이 재조합되는 불쾌한 열을 견뎠다.
네 번째·다섯 번째 각인을 그릴 때마다 머릿속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중얼거렸다.
“문이 되되, 를 들이지는 않는다.”

붉은 결정 입자밀도 실시간 그래프가 완만하게 꺾였다.
그리고 스프링의 단말기에서 알림음.
<라그나 실드 5-Node 동기화율 100.000%>

하늘은 아직 칠흑이었지만, 저 멀리 동 트기 전 회색 선이 조금 오래된 담배연기처럼 번져 있었다.


10. 엔드 카드 ― 잠시의 정적

05:06. 전광판 카운트가 47 : 00 : 01로 변할 때, 레이븐은 마지막으로 각인을 쓰다 쓰러졌다.
치직 치직— 기계음.
의무실에서 깨어난 그의 귀에, 민지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못 죽었네?”
“안 죽었네.”
“라그나 실드 돌입 성공이래.”
“붉은 비… 막았나요?”
민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막은 게 아니라, *조금 미뤘*을 뿐.

창밖에서 새벽빛이 애매하게 번져 있었고,
레이븐 손등 각인은 어느새 검은 실루엣 속 흰 까마귀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모니터 한편엔 또 다른 붉은 메모가 떠 있었다.

“카시엘 : Plan β(베타) 가동, T-24 h.”


7화 예고
— 라그나 실드 발효 후, 카시엘은 Plan β를 실행한다.
— 서울 전역에 나타난 ‘숨 쉬는 거울’과 무작위 차원 틀어짐, 그리고 붉은 비보다 먼저 떨어지는 푸른 번개.
— 민지의 동조 후유증이 극한에 달하고, 레이븐은 손등 각인 속 흰 까마귀의 정체를 마주한다.
— 아르카이아 내부에 숨어 있던 배신자가 움직이며, 라그나 실드 핵심 노드 두 개가 비밀리에 잠식!
준비된 방패가 깨질지, 진짜 새벽은 올지― 7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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