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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븐: 광휘의 종언

5화 - 오블리비언 나이츠

by st공간-레이븐 2025.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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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오블리비언 나이츠


0. 귀환, 그리고 울리는 금속음

송도 갯벌에서 체취한 G-코어 파편은 세 겹의 봉인 캐니스터에 담긴 채 지하 40미터 연구동으로 옮겨졌다.
아르카이아 본부 복도 곳곳에 자동 차폐문이 내려앉고, 공기 정화 장치는 최대 출력으로 돌아갔다. 기계음 속에 레이븐 팀 네 사람의 발소리만이 또각또각 울렸다.

“위험등급 S-Seven.”
로건 장의 저음이 섞인 인터폰이 벽마다 반향을 남겼다.
“연구동 통제권은 내 손에 있다. 건드리는 순간 폭주 스택이 올라간다. 명령 없이는 절대—”
짝, 하고 민지가 인터폰 버튼을 끊었다.
“그러다 열 받으면 코어가 먼저 반응해요, 장 지부장님.”
“…….”

지훈은 말없이 캐니스터를 바라봤다. 은빛 합금 표면 아래 붉은 심장이 발광 패턴을 그리며 규칙적으로 수축—
두, 두, 두… 그 박동이 어째서인지 자신의 심장과 박자를 맞추는 느낌이었다.


1. 연구동 B-5 「와우루스」

정육면체 실험실 가운데, 초저온 격리홀.
파편은 –78 ℃ 액체질소층 위에 매달린 채, 추가 봉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구팀장 조하령 박사가 압괴 복‧스페이스슈트를 걸친 채 컨트롤 패널을 조작했다.

조하령
“표면 진화 계수 0.07 → 0.09. 분자 망상도가 늘어납니다.”

박민지
“예상보다 빠르네요. 대혼 잔향이 여전히 활력(活力)을 유지하고 있어.”

조하령
“분해·파괴를 시도하면 코어 자체가 ‘역이온화 파동’을 뿜어낼 가능성 31%. 반경 3 킬로 방사성-마나 혼합 오염.”

로건 장
“그럼 ‘동조’ 실험 외엔 선택지가 없다.”

—팽팽한 침묵—

“동조라니, 대혼 주파수를 맞춰 준다는 말씀입니까?”
레이븐이 낮게 묻자, 하령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말해, 격리 대신 사용한다는 것이죠.”

민지가 무섭도록 차가운 시선으로 로건을 노려봤다.
“지부장님, 작년 시베리아 실험 기억 나시죠? 코어-A 역동조 하다가 연구원 셋이—”
“알아.” 로건이 끊었다.
“하지만 S-Seven은 구조가 달라. 대혼 사태 때 실종된 마스터-키 σ-플레이트 일부일 수도 있다. 손에 넣기만 하면—”
“‘손에 넣는 순간’ 오더랑 똑같은 수준으로 내려앉겠죠.”

지훈은 두 사람 사이에 느낀 적 없는 서늘한 균열을 보았다.
그리고…
두, 두, 두… 탁.
박동이 순간 멎었다.


2. «낯선 목소리»

공기에 매캐한 철 냄새가 퍼졌다.
레이븐만이 들었다.
“…들리나.”
목소리는 캐니스터를 통과해 바로 고막 안쪽을 건드렸다.
저음도 고음도 아닌, 메아리 자체.
“…새 깃을 단 사수(射手)여.”
지훈은 무심코 AR-X9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손등 각인이 뜨거웠다.

스프링
“레이븐? 얼굴 색이—”

“아… 아니, 괜찮…”
하지만 다음 순간, 캐니스터 벽이 찌르륵 갈라졌다.
은빛 합금에 균열이 퍼지며, 붉은 심장이 밖을 향해 조금 비틀렸다.

“결속력 12%↓! 비상 봉인!” 조하령 박사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심장 속에서 칠흑 가시가 뱀처럼 뻗어 나왔다.
살아 있는 의지—그리고 분명한 악의.

“물러나!” 민지가 손바닥에 봉쇄 진형을 그리려 했으나, 가시는 레이븐 앞에서 번쩍 멈추더니 스르륵— 기이하게 꺾여 캐니스터 안으로 다시 말려들었다.
고요.

“네가 목격자가 되라.”
어느새 박동은 사라졌다. 파편은 완전히 진정된 듯 했지만, 심장의 빛은 레이븐을 바라보듯 미묘한 맥동을 남겼다.


3. 『파멸·사용·봉인』, 삼갈래 회의

임시 대책실.
벽 스크린엔 DESTROY / UTILIZE / ISOLATE 세 단어가 붉게 번갈아 떴다.

  • DESTROY : 고출력 이온 빔으로 즉시 분해. 3 km 오염 위험.
  • UTILIZE : 마스터-키 탐색을 위한 동조. 오더가 노리는 기능 선점.
  • ISOLATE : 남사(南沙) 해저격리 기지에 장기 폐기. 오더 침탈 위험 47%.

지부 간부진은 셋으로 갈렸다.
조하령·기술팀은 Utilize;
민지를 포함한 현장 요원 중 절반은 Destroy.
로건은 이용을 밀어붙이려 했고, 장기 격리 쪽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좀처럼 표를 얻지 못했다.

“레이븐, 당신 의견은?”
모두의 눈이 동시에 향했다.

지훈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제 의견은… 잠시 유보하겠습니다.”
“왜?”
“코어가… 저한테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폭죽이 터지듯 고성이 오갔다.
로건은 “증명할 수 있나?”라고 물었고, 민지는 손을 내리치며 “조율자 흉내내는 주파수일 뿐!”이라며 부르르 떨었다.
결국 최종안은 새벽 정기 회의 때까지 보류로 결정.
코어 파편은 초저온실에 다시 봉인됐다.


4. 구내 정전, 그리고 침입자

23시 12분.
지하 연구동 A-관 변전실 퓨즈가 ‧‧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비상 LED가 켜지기 전, 모서리마다 달린 고감도 센서가 7초 동안 눈을 잃었다.

바로 그 틈,
칠흑 외투에 은색 복면을 두른 사내가 통풍덕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엔 블랙실 라이트블레이드, 다른 손엔 오더 특수부대 ID 스티커.
오블리비언 나이츠.

“목표: G-코어 파편 회수.”
금속 가면의 톤은 기계음에 가까웠다.
양손 검지가 서로 맞닿자, 블레이드 끝에서 검은 전기불꽃이 달궈졌다.
복도가 열흘 묵은 석탄 냄새로 가득 찼다.

첫 번째 경비 드론이 반응하자, 나이츠는 손목을 돌려 ‘影斬(영참)’이라 불리는 절삭파를 내질렀다.
드론 단말기 CPU가 흔적도 없이 슬라이스돼 바닥에 굴렀다.
두 번째 방호문은 출입카드 따윈 필요 없다는 듯 무음으로 열렸다.

12층 아래, 초저온실 진입 직전.
나이츠는 허리춤에서 작은 피아노 열쇠를 꺼냈다.
검은 아우라가 피아노선(線)을 따라 번져 나가더니, 열쇠 끝에서 미묘한 진동이—

퍽!
갑작스러운 충격이 후두부를 강타했다.
나이츠가 휘청하며 뒤돌아보자, 통제복 입은 이지훈—아니, 레이븐이 표정 하나 없이 AR-X9 개머리판을 다시 들어 올렸다.

“너잖아, 가론.”
그래픽 헬멧 아래로 한기가 묻어나는 음성이 새었다.
금속 가면이 느릿하게 웃었다.
“‘뒤바뀐 조율’ 대상 넘버 3-4-7. 당신이었군.”


5. 7초 공방

총소리는 없었다.
대신 가론의 블레이드가 공기마찰로 불을 긋는 순간, 레이븐은 총구를 아래로 내리고 맨몸 돌진을 택했다.
“레이븐!” 벽 스피커 너머 민지가 비명을 질렀지만 다 들릴 리 없었다.

0.0 sec
블레이드가 수평으로 휘두른다.
0.3 sec
레이븐의 두 번째 시야가 ‘예측’ 그래프를 그렸다. 42 도 , 190 cm 높이.
0.6 sec
왼쪽 무릎을 굽혀 머리를 숙이고, AR-X9을 한 바퀴 돌려 중력 가속을 덧씌운 뒤—
0.9 sec
가론의 오른팔을 개머리판에 끼운 채 뒤로 꺾었다. 기계뼈가 드득! 하고 뒤틀렸다.
1.1 sec
그러나 블레이드가 팔을 놓치자마자 그림자에서 새 날이 돋아 레이븐의 옆구리를 베어 갔다.
피가 푸슉 튀었다.

레이븐은 악착같이 버텨 블레이드 손잡이를 눌러 삼각 관절기를 완성했다.
“목표: 동체 확보.”
“목표: 거부.”
짧은 대화.

2.5 sec
가론이 그림자에서 두 번째 팔을 외부 출력. 레이븐 머리 위 포인트 찌르기.
3.0 sec
레이븐, 오른발 회전축으로 어깨 공중낙법. 동체가 가론 가슴 위를 타고 넘는다.
3.3 sec
허리춤 억압 나이프 뽑기. 가론 뒤통수 0.4 cm 지점 삽입.
3.5 sec
블레이드 파동이 레이븐 손목을 스친다. 피를 빨아 화염이 일렁.
4.1 sec
레이븐, AR-X9 방아쇠를 2연격. 초근거리 마력 버스트가 가론 흉곽 코어를 타격.
5.7 sec
가론의 몸에 금빛 균열. 그가 낮게 비웃는다. “진화는 이미 시작됐다.”
7.0 sec
블레이드가 일순간 산화하며 자신의 가슴을 꿰뚫는다.
가론이 몸을 후려치듯 뒤로 날리며 코어 캐니스터 쪽 벽을 파괴—그리고 그대로 모래먼지처럼 파편화.

정적.
레이븐은 무릎을 꿇고 숨을 삼켰다. 장갑 안쪽이 피로 질척거렸다.


6. 붉은 비, 그리고 결단

경보음이 빗발처럼 터졌다.
초저온실 액체질소가 새어 나오고, 파편 열선은 심지어 한 층 더 붉어진 채 캐니스터 벽을 삭히고 있었다.
민지가 달려와 외쳤다. “더는 못 막아! 폭주한다면 차라리—”

레이븐이 고개를 저었다.
“대화가… 또 들립니다.”
그는 상처투성이 몸을 끌고 캐니스터 앞으로 섰다.
흉곽·사선·하악 각각에 난 칼집에서 피가 흐르는데, 손등 각인이 갈수록 눈부시게 빛났다.

“네가 문이 된다.”
“빛과 그림자, 두 궤도의 접점.”

레이븐은 숨을 들이켜 오른손을 캐니스터 외벽 위에 얹었다.
“…이 코어, 접속(동조) 후에 폐쇄하겠습니다. 제가 매개가 돼요.”
“미쳤어?” 민지가 외쳤다.
“그래도 파괴나 탈취보다 낫겠죠.”

로건이 인터폰으로 낮게 중얼댔다.
“인정. 단 15초 동조, 그 즉시 회로 차단.”
“동의.” 민지의 두 눈엔 피로가 서려 있었지만, 이견을 낼 수 없었다.

조하령 박사가 새 봉인 패널을 세팅했다.
“에테르 링크 9-Phase. 레디.”


7. 15초 동조 ― 「밤과 새벽 사이」

링크 Start.
붉은 심장이 레이븐 각인을 통해 음표처럼 쏟아졌다.
시각, 청각, 후각이 한꺼번에 반전—
빛은 검고, 어둠은 푸르고, 공기는 바다 소금물 냄새.

레이븐은 어디인지 모를 거대한 복도에 섰다.
천장은 보이지 않았고, 바닥은 물처럼 울렁였다.
저 먼 곳에 청동 거울이 떠 있었고, 그 앞에 긴 로브를 두른 사내가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가론이 실패했군.”
사내가 고개를 돌리며 낮게 웃었다.
“그래도 열쇠는 내 손에 들어왔다. 곧 ‘붉은 비’가 서울을 뒤덮을 것이다.”
레이븐이 총을 겨누려 했지만 손이 투명해졌다.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조율자와 그 사수(射手)에게 전해라. 대혼이 끝난 것이 아니라, 속행 중이라고.”

8″
레이븐의 시야가 뒤틀리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뜨거워졌다.
11″
“내 이름을 기억하라. 가론? 아니다. 진짜 이름은—”
12″: 회로 컷오프 예고
사내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레이븐의 몸이 강제로 현실 쪽으로 끌려났다.
마지막으로 들린 건,

“…카시엘.”

15″ END.


8. ‘붉은 비’ D-72 Hour

레이븐은 캐니스터 앞 바닥에 쓰러졌고, 연구동 내부엔 다시 초저온 안개가 짙게 깔렸다.
민지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물었다.
“무슨 얘길 들었어?”
“대혼은… 멈춘 게 아니랍니다.”
“뭐?”
“‘붉은 비’가… 72시간 안에 서울을 뒤덮을 거라고.”

그가 눈을 감자, 손등 각인이 새로운 형상으로 재배열됐다.
Lv.2 SYNC 확정

로건 장은 서류철을 덮으며 짧게 말했다.
“72시간 후. 가론(혹은 카시엘)이 다시 움직인다.
작전 코드명 라그나 篇 개시.”

강철문이 닫히고, 정화 팬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하 연구동 천장 패널 틈 사이로,
보이지 않는 붉은 물방울 하나가 톡— 하고 떨어져 액체질소 조도(槽) 위에서 증발해 버렸다.


6화 예고
 72시간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서울 상공에 떠오르는 미세 ‘붉은 결정’과 시민들 사이의 불안.
 레이븐 팀은 오더 잔존 세포를 추적하며, 동시에 대혼 주파수 방어막 **“라그나∙실드”**를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지하철 변전소·도심 빌딩 옥상 등 다섯 군데에서 동시다발 흡혈 의식이 벌어지고,
 민지는 코어 동조 후유증으로 의식을 잃어 간다.
 적의 실명 ‘카시엘’, 그리고 붉은 비의 첫 낙하.
 세계가 바뀔 리허설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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