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아르카이아, 빛과 그림자 사이
지훈은 민지의 SUV 조수석에 앉은 채, 동이 터 오르기 직전의 회색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서울올림픽대로를 남쪽으로 빠져나가던 차는 하남을 지나 광주 초입에 다다라서야 속도를 줄였다.
창밖에는 산업단지의 불 꺼진 공장들이 들쑥날쑥 그림자를 드리우고, 옅은 새벽 안개가 파도처럼 허공을 뒤덮었다.
민지는 오디오도, 라디오도 켜지 않은 채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차 안의 침묵은 폭발 직후 귀 안에 울리던 이명(耳鳴)처럼 이상하게 길고도 무겁게 흘렀다.
“말씀하셨던 본부, 여기 근처인가요?” 지훈이 결국 입을 뗐다.
“곧 도착해요. 표면적으론 그냥 ‘구 경기도광주시 폐수처리장’으로 등록돼 있어요.”
“폐수처리장?”
“실제로는 수도권 지하수 관측용 폐시설. 10년 넘게 사용되지 않았죠. 재개발 후보지에서 빠졌길래 우리가 선점했어요.”
“국정원 예산으로요?”
민지가 미소를 지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차는 외곽 순환도로를 벗어나 작은 샛길로 진입했다.
친환경 조명이라던 가로등은 절반 가까이가 꺼져 있었고, 울퉁불퉁한 시멘트 위를 굴러가는 타이어가 덜컹댔다.
잠시 후,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씌어진 낡은 철제 슬라이드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지가 창문을 내리고 카드키를 대자, 게이트 위에 매달린 고물 센서가 삐걱대며 문을 열었다.
지훈이 재빨리 주변을 살폈으나 CCTV는 보이지 않았고, 군데군데 서 있던 기둥엔 오래된 방범등만이 희미하게 깨져 있었다.
“의외로 보안은 허술해 보이네요.”
“눈에 보이는 건 다 가짜예요. 진짜 감시는 ‘전송식 마력센서’로 돌아가니까.”
“그런 기술 처음 듣는데…”
“당연하죠. 공식 특허가 아니라 조직 내부 비기니까.”
차가 지하 램프를 따라 내려가자, 폐수처리장이라고 믿기 어려운 넓은 터널이 나타났다.
벽은 바닥까지 매끈하게 새로 도색돼 있었고, 천장에 박힌 LED 라인은 군사시설에서나 볼 법한 하얀 조명을 쏟아냈다.
약 200미터쯤 전진했을까. 터널 끝에 붉은 팔각문이 둥근 해치 형태로 잠겨 있었다.
민지는 대형 방폭 게이트 앞에 차를 세우고 하차했다.
해치 한쪽에 있는 손바닥 크기의 투명 패널에 검지를 대자, 두꺼운 철판이 낮은 진동음을 내며 좌우로 갈라졌다.
“어서 오세요.”
문이 열리자마자, 검은 제복에 금빛 앰블럼을 단 백발의 장신이 우레 같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지부장님, 데려왔습니다.” 민지가 짧게 경례를 붙였다.
“수고했네, 박 요원. 그리고… 신입 헌터 씨.”
백발 사내의 명찰에는 Logan A. Jang이라 씌어 있었다.
미군 출신을 연상시키는 이름과, 언뜻 영문식 발음을 곁들인 낮은 톤이 묘하게 어울렸다.
“‘레이븐’이지?” 장 지부장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정식 호출부호는 처음 듣습니다만… 네, 맞습니다.” 지훈이 악수를 받아들이자 손등에 새겨진 금빛 각인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손목 태그, 인식 완료.” 지부장의 왼손에 낀 링형 단말기가 짧은 전자음을 흘리더니, 곧장 녹색 불이 들어왔다.
“자네를 위해 우선 대기실을 배정해 뒀네. 채비하고 나오면 오리엔테이션 진행하지.”
“알겠습니다.”
민지가 안내한 대기실은 호텔 스위트처럼 깔끔했다.
아스팔트 먼지와 피트 냄새가 묻은 옷을 벗어 던지자, 벽 한쪽에 자동 세탁 드론이 달려 나와 의복을 빨아들였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수는 비누 냄새까지 자동으로 조절되는 듯 은은한 백단향이 섞여 있었다.
30여 분 후, 제공된 블랙 택티컬 수트를 입고 거울 앞에 서자, 지훈은 자신이 여전히 경찰 배지를 떼지 않은 ‘상근 순경’처럼 보였다.
하지만 손등에서 맥동하는 각인, 그리고 가슴에 달린 작은 문장(紋章)은 그가 이미 완전히 다른 국적, 아니 ‘다른 세계’에 여권을 발급받았음을 증명했다.
1. 사령실, 그리고 ‘지도 밖의 전쟁’
“레이븐, 이쪽이야.” 민지가 직접 나타나 그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정사각형 테이블 중앙엔 홀로그램 맵이 떠 있었고, 높이 2미터쯤 되는 서가에는 열람금지 스티커가 붙은 고서들이 빼곡했다.
벽면 전체를 차지한 스크린에는 한글·영문·라틴어와 익숙지 않은 룬 문자가 뒤얽힌 보고서가 실시간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장 지부장이 막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아르카이아’의 정체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지. 다른 조직이 우리를 뭐라고 부르든, 우린 스스로를 ‘홈리스’라고 칭한다.”
“노숙자…요?” 지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엄밀히 말하면 ‘국가의 집’에 소속되지 않은 초국가 마술첩보 연합체야. 지금 이 방에 든 모든 자료는 한국도, 미국도, 심지어 UN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지.”
“전부 그림자 예산인가 보군요.”
“그림자라 해도 좋아. 다만 우리가 수호해 온 건 예산이 아니라 ‘조율’의 균형이야.”
장 지부장은 탁자 위 홀로그램을 확대했다.
지구 모양이 돌면서,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 요충지에 빨간 점과 파란 점이 빛났다.
“빨간 건 섀도우 오더 세력, 파란 건 우리 또는 우호 단체. 저들은 마법을 ‘수단’이 아닌 ‘목표’로 숭배해. 전 세계를 거대한 제물로 바꿔선, 마력을 무한히 끌어올리는 ‘대혼(大混)’을 노리지.”
“그럼 방금 우리를 공격한 흑마법사는…”
“섀도우 오더가 쓰는 일종의 정찰 말뚝. 인간 혼을 매개로 한 인형술이지.”
“본체는 아직 숨어 있고요.”
“맞아. 그리고 본체가 움직이기 전, 반드시 선행되는 게 하나 있다.”
민지가 서류를 건넸다.
《EMERGENCE REPORT / C-2 Seoul / 03:47 KST》라 출력된 종이였고, 첫머리에 굵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발화자(각성자) 1명, 판정 ‘F-λ’ / 위치: 송파구 잠실역 환승구간
“각성자라…?” 지훈이 낯선 표현에 눈길을 줬다.
“일반인이 우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마나 회로를 열어 버리는 현상. 대개는 심리적 트라우마나 극한 스트레스가 방아쇠가 되고, 운이 없으면 폭주해.”
“폭주하면?”
민지가 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 “폭사(爆死) 혹은 폭주, 주변 수십 명이 동반 사상. 무슨 신변종 질병처럼 퍼져서 지구 자체를 뒤틀 수 있어.”
“그래서 지금?”
“잠실역 전체가 30분 전에 일시 봉쇄됐어. 표면적 이유는 ‘열차 차단기 고장’. 실제론 각성자 폭주 징후를 막으려는 격리 작전이지.”
지훈은 즉시 기억을 더듬었다. 잠실역—인구 밀집, 유동인구 최소 하루 백만.
한순간에 통제 실패하면, 광역 테러에 필적하는 재앙이 될 터였다.
“우리 요원 몇 명 투입됐나요?”
“두 명.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섀도우 오더 쪽 감응 시그널도 포착됐다.”
“즉, 그들이 각성자를 낚아채기 전에 우리가 먼저 진정시키거나 확보해야 한다.”
“정확해.”
장 지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없는 벽 쪽을 손바닥으로 스윽 그었다.
그러자 돌벽이 빛의 주름처럼 갈라지며 작은 무기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븐, 이게 네 첫 공식 임무다.”
2. 하이브리드 리그, 그리고 ‘아스펠라이트’
무기고 안은 외계선박을 연상케 하는 반사광으로 가득했다.
보관선반마다 ‘에테르-메카닉’이라는 낙인이 찍힌 장비가 각별히 진열돼 있었다.
민지가 한쪽에서 그의 전용 케이스를 꺼냈다.
“AR-X9 Raven Spec. 블록 3세대 하이브리드 총열, 레일 위엔 아스펠라이트 결정이 삽입돼 있어.”
“아스펠라이트?”
“마법 촉매. 탄관에 사흡성 룬이 각인돼 있어서, 마나를 흡수하거나 발산할 때 총열 내에서 자동으로 ‘공명 충격파’를 만들어줘. 간단히 말해, 화려한 불꽃쇼도 가능하단 얘기.”
지훈은 총을 받아 어깨에 붙여 보았다.
무게중심이 평범한 라이플보다 살짝 뒤쪽으로 치우쳐 있었지만, 반동 억제 패드와 연동된 코어 버퍼 덕분에 부담은 크지 않았다.
탄창을 꽂고 볼트를 당기자, 은은한 청색 빛이 챔버 안에서 번쩍였다.
마치 가늠쇠 너머로 보이는 세상까지 색이 바뀌는 듯한 착각이 밀려왔다.
“탄환은 두 종류. 일반 5.56mm 분리형 케이스, 그리고 마력 증폭용 ‘하빈저 셀’. 후자는 한 발당 불꽃 한 번, 생체표적 기준 반경 2m까지 마력 충격을 방출해.”
“반동이 심할 텐데.”
“괜찮아. 아스펠라이트가 자체적으로 반력 40%를 상쇄해.”
“도대체 이런 물건 제작 단가는…”
“세부 사항은 회계팀이 알아서 해.” 민지가 웃어 넘겼다.
장 지부장은 데이터 패드를 불쑥 내밀었다.
“현장 투입 요원, 코드네임 ‘스프링’과 ‘하운드’가 이미 잠실역 지하 3층 플랫폼에서 지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비밀 연결통로로 접근한다.”
“서울 한복판에 그런 통로가 있었습니까?”
“90년대 초, 청와대 비상 대피선 구축할 때 파놓은 실험 노선 일부야. 오래전 묻힌 기록이지.”
“역시 비밀이란 게 너무 많군요.”
“불편해도 받아들여. 이 세계는 ‘개방’이 곧 멸망이니까.”
3. 잠실역, 04:35
아르카이아 쪽 지하 셔틀은 발사대가 딸린 궤도열차 형태였다.
동력은 전기 모터가 아니라 ‘에테르 블레이즈 코어’라고 설명됐는데, 지훈이 이해하기엔 일단 전기보다 조용하고 빨랐다.
3분 만에 열차는 완전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와 콘크리트 끝단에서 멈췄다.
앞에는 철문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스캐너가 민지와 지훈 손목의 각인을 동시에 인식하자 벽이 양옆으로 열렸다.
“RAVEN, SPRING에게 도착 알림 신호 발신.”
“신호 수신, 오케이.” 귓속 이어피스에서 맑은 여성 목소리가 들렸다.
‘스프링’은 현장 요원답지 않게 유쾌한 어조였다.
“지하 3층 플랫폼, 중앙 기둥 뒤 환풍구 근처에서 대기 중. 아직 폭주 전. 생체 시그널 불안정.”
민지가 곧장 묻는다. “섀도우 오더 시그널은?”
“4분 전부터 미약한 잔여 파장. 다만 이동추적이 안 돼. 잠복 가능성 80%.”
통로 끝, 금속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잠실역 대합실 후면 벽이 뚫려 있었고, 임시 격벽이 세워져 경찰 관계자 출입금지 테이프가 둘려 있었다.
밤새 지하철이 끊긴 시각이지만, 거대한 공간엔 희뿌연 조명만이 텅 빈 의자와 안내 표지판을 비추고 있었다.
전기적 윙윙거림 외엔 발소리조차 삼키는 정적.
지훈은 저격수 모드로 호흡을 낮추며, 플랫폼 쪽 어둠 속을 응시했다.
“타깃은 20대로 추정되는 남성. 직업은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 약 두 달 전부터 불면증·망상증세.” 스프링이 저쪽 어딘가에서 정보를 전송했다.
“마나 노출량이 급증하는 이유?”
“뇌파 패턴이 혼재돼 있어 분석 불가. 고위험 감정인 ‘무력감’과 ‘죄책감’이 교차.”
“자살 직전 상태?”
“비슷해. 그래서 더 위험해.”
민지가 손바닥을 펼쳐 막대기 같은 힘줄 형상을 엮더니, 금빛의 작은 파리 모양 ‘시야 탐사기’를 날렸다.
탐사기가 플랫폼 상공 10미터쯤을 선회하는 순간, 크르릉—하고 공기가 갈라졌다.
순식간에 검은 파편이 날아들어 탐사기를 산산조각 냈다.
“암영 탄막!” 스프링이 외쳤다.
동시에 플랫폼 끝, 4호선 선로에서 시커먼 불길이 피어올랐다.
마치 화산재가 소용돌이치듯, 뿌연 입자가 원을 그리며 증식했다.
그 중심에서 하얗게 질린 남자가 비명을 삭여 삼킨 듯 떨고 있었다.
“F-λ급이 맞나?” 하운드의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무전으로 들어왔다.
“체감으론 이미 E급 넘어.” 민지가 칼같이 대답했다. “RAVEN, 초탄으로 녀석 시야를 끊어.”
“명령 확인.”
지훈은 숨을 들이쉰 다음, 헐겁게 조준을 이동했다.
폭주자의 정수리 약간 위—발사 충격파가 머리 바로 뒤 기압을 흔들면, 반사적으로 고개가 뒤로 젖혀질 것.
총열이 살짝 가라앉았을 때, 검은 입자가 지훈을 향해 회오리치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느려졌다. 방아쇠, 1mm, 2mm—
탕!
청색 섬광이 선로 위 공기를 찢었다.
탄환이 폭주자 뒤 콘크리트를 관통하며 마력 충격을 퍼뜨리자, 난폭하게 요동치던 입자가 잠시 흐트러졌다.
“확인, 교란 성공.” 민지가 외쳤다. “하운드, 진입!”
저편 음영에서 꿈틀거리던 덩치 큰 남자가 튀어나왔다.
하운드—온몸에 강철 문양이 새겨진 특수강 보디슈트 차림.
그가 선로로 뛰어들어 폭주자와의 거리를 5미터까지 좁히는 순간, 뱀처럼 길게 뻗은 그을음이 그의 목을 향해 채찍질했다.
하운드는 비스듬히 몸을 틀어 피했지만 헬멧 한쪽이 벗겨져 나갔다.
“RAVEN, 마력 포화각 40%. 두 번째 하빈저 셀 준비.”
지훈은 볼트를 재당기며 사격선을 변경했다.
이번엔 폭주자와 하운드 사이 공간에 탄환을 터뜨려 방벽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총열이 막 빛나려는 순간, 머리 뒤편에서 싸늘한 바람이 스쳤다.
카직—!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금속이 베인 소리, 그리고 정지된 시야가 뒤틀렸다.
지훈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춰 앞으로 구르며 급히 권총을 뽑았다.
바로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자리, 어째선지 그림자 하나가 칼날처럼 솟아났다가 사라졌다.
“후방 교란! 섀도우 오더 숨어 있다!” 스프링의 경고음이 퍼졌다.
“RAVEN, 괜찮아?” 민지가 달려왔다.
“살짝 긁혔습니다.” 지훈이 귓바퀴에 묻은 핏방울을 닦아냈다. 다행히 깊지는 않았다.
그때, 플랫폼 천장에서 2층 높이의 안내 간판이 타악—하고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낮춘 지훈은 거꾸로 뒤집힌 간판 뒤에서 검은 후드를 쓴 남자를 보았다.
흰 가면에 입은 그어진 듯 얇고, 눈 구멍 속은 텅 비었다.
“또 호스트?”
“아니,” 민지가 이를 악물었다. “저건 호스트보다 한 단계 위—미러 시커.”
“이름처럼 ‘거울’ 역할?”
“우리 행동 예측을 실시간으로 복제해 맞대응하는 인형이야. 쉽게 말해, 생각을 베끼는 괴물.”
가면남이 오른손을 올리자, 바닥의 파편이 허공에 떠올랐다.
파편이 서로 들러붙어 단검 모양을 만든 뒤, 지훈에게 날아왔다.
지훈은 이제 국지전술 대신 본능을 믿어야 했다.
왼쪽 어깨를 비스듬히 빼고, 오른발로 바닥을 차면서 총열을 가면에 겨누었다.
탕!
하지만 가면남의 머리는 옆으로 1cm 미끄러지듯 피했다.
탄환은 뒤 벽 신호등을 맞혔고, 깨진 유리가 우수수 쏟아졌다.
“예측이 벌써 읽힌 거야!” 민지가 외쳤다.
“그렇다면—” 지훈은 총구를 땅으로 내렸다.
순간 가면남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때를 노려 민지가 손끝으로 바닥에 ‘逆(역)’ 자 비슷한 룬을 그렸다.
룬이 빛나며, 몇 초 전 깨져 흩어졌던 유리 파편이 거꾸로 공중으로 솟구쳤다.
시간이 거슬러 오르는 듯, 파편은 원래 깨지기 전 상태의 신호등으로 돌아가려는 힘을 받았다.
그러나 열역학 법칙을 거스른 반동은 바로 옆에 있는 가면남에게 작렬했다.
쏟아지는 파편과 반사광이 한번에 폭죽처럼 폭발하자, 가면남이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지금!”
지훈은 허리를 세우며, 라이플 탄창을 바닥에 떨궜다.
‘하빈저 셀’ 한 발만을 직접 손으로 끼워넣고, 세미오토에서 버스트로 스위치를 돌렸다.
트리거를 당기는 순간, 총열을 따라 푸른 섬광과 붉은 잔광이 겹이뤄 솟았다.
타다당!
첫 번째 탄이 공기를 가르고, 두 번째 탄이 충격파를 증폭해, 세 번째 탄이 그 둘을 포개어 마력 폭렬구를 형성했다.
폭렬구는 가면남을 삼키며 붉은 꽃처럼 피었다.
고막을 찌르는 낮은 울음소리와 함께, 가면남은 검은 연기만 남기고 분해됐다.
“타깃 베끼기 기능, 사라졌다!” 스프링이 환호성을 질렀다.
민지는 곧장 플랫폼 쪽 하운드에게 무전을 보냈다. “주요 방해 요소 제거. 하운드, 구속 시도!”
이제 폭주자는 머릿속에서 자신의 악몽과 싸우느라 주변을 인식하지 못했다.
하운드는 달아오르는 선로 열을 무릅쓰고 남자를 덮쳐 등 뒤 관절을 고정했다.
민지가 옆으로 뛰어가 손바닥을 그의 관자놀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읊었다.
“Somno lenis. Cor meum, fluctus…”
회색 입자가 사그라지듯 꺼지고, 남자의 몸이 축 늘어졌다.
지하공간을 뒤덮던 음울한 공기가 걷히고 나서야, 지훈은 마침내 방아쇠에서 손을 뗐다.
플랫폼 천장에 걸려 있던 시계가 ‘04:58’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투 시작부터 12분—그러나 한나절은 넘긴 느낌이었다.
4. 폭풍 뒤의 쉼표
구급드론이 플랫폼에 내려와 환자와 부상자를 분류했다.
민지는 경찰과 코레일 보안팀에 “배전 계통 이상으로 인한 연기 발생”이라는 덮어쓰기용 보고서를 배포했다.
장 지부장은 신속히 현장으로 내려와 지훈과 악수하며 말했다.
“첫 임무 치고 아주 훌륭했네. 미러 시커를 단번에 제압하다니.”
“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훈은 겸손했지만, 가슴 속 어딘가가 뜨겁게 뛰었다.
‘이게 내가 설 자린가.’
얼마 뒤, 이동용 밴에 오른 뒤에도 아까의 전투 장면이 플래시처럼 머리를 때렸다.
민지는 옆에서 휴대 단말기로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문득 지훈에게 새 하빈저 셀 한 발을 건넸다.
“기념으로 챙겨. 본부 돌아가면 탄약고에 반납해야 하지만, 첫 실전은 기록으로 남겨야 하니까.”
지훈은 빛나는 탄피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총알 하나가 이렇게 묵직할 줄 몰랐다.
차창밖으로 새벽 여명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강변북로 너머 한강이, 어제와 똑같은 흐름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훈의 세계는 단 한밤 만에 완전히 변해 있었다.
폐수처리장 지하의 은신처, 빛나는 마술 장비, 그리고 인간 속에 숨은 폭주하는 거인들.
그 모든 빛과 그림자 위에, 스스로를 ‘레이븐’이라 부르는 새로운 이름이 겹쳐졌다.
“레이븐.” 민지가 불쑥 불러 세웠다.
“네?”
“방금 전, 네가 탄창을 비우고도 도망치지 않은 장면… 솔직히, 좀 무섭더라.”
“특공대식 교육입니다. 퇴로보다 기회를 먼저 찾으라는.”
“그 용기, 앞으로 많이 필요할 거야.”
“그러기 위해 여기 왔죠.”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차가 갓길에 잠시 멈췄다.
둥근 햇살은 마치 세계가 새로 고쳐지는 순간처럼 밝았다.
지훈은 창문을 내려, 모닝커피 캔을 손등 각인 위에 올려 두었다.
따뜻한 금속이 피부를 데우며, 조용히 ‘새로운 하루’를 알려 주는 듯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민지의 무전기가 갑자기 요란한 경보음을 뿜어냈다.
<URGENT: G-CLASS SIGNATURE DETECTED / LOCATION: 인천광역시 송도 갯벌 매립지>
짧은 순간, 차량 내부 공기가 얼어붙었다.
지훈은 캔커피를 꽉 쥐었다. 따뜻했던 금속이 이내 식어 갔다.
“긴 휴식은 없다, 레이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궤도 없는 전장으로 다시 발을 내딛었다.
4화 예고
인천 송도, 미완성 국제업무지구 지하에서 ‘G-클래스’, 즉 자연현상을 뒤틀 만큼 강력한 각성 파동이 발현된다. 레이븐 팀은 첫 출동에서 겪지 못했던 공간 변칙 현상과 마주하게 되고, 섀도우 오더의 정규작전부대 ‘오블리비언 나이츠’와 처음으로 정면 충돌한다. 민지가 숨겨온 과거, 그리고 레이븐 내면에 잠든 ‘두 번째 시야’가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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