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검은 불꽃
가든5 후면 공터를 감싼 밤 공기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팽팽했다.
가로등 하나가 비추는 원 안, 검은 실루엣의 무장은 이지훈을 겨누고 있었다.
짧게 깨지는 듯한 클릭—볼트를 당기는 소리가 새벽 공기 속에 우뚝 솟았다.
“쉬익… 다크, 오른쪽 30미터.”
민지의 속삭임이 귀에서 메아리쳤다. 그녀는 SUV 뒤편에 몸을 숨기며 두 손을 번갈아 움켜쥐었다.
짧은 맥박 같은 빛이 그녀의 손등에서 터져 나왔다. 마력의 증폭.
하지만 지훈의 눈에는 그보다, 상대 편의 미세한 호흡이 더 뚜렷했다. 특공대 시절 길들인 야수 감각이 되살아났다.
첫 번째 섬광
‘시야 확보, 거리 약 42미터… 바람 2m/s 서풍.’
지훈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낮추며 SUV 앞바퀴 뒤쪽을 엄폐물 삼았다. 무장한 실루엣은 소음기 달린 권총을 들고 있었으나, 한 손은 허공에 무언가를 휘젓고 있었다.
“…마법사?” 지훈이 중얼대자 민지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는 사람, ‘오컬트 헌터’라 불리는 녀석이야. 우리 조직이 ‘주문밀수’로 명단에 올려 둔 위험 인물이거든.”
“근데 왜 여기까지 온 거죠?”
“네 감응 능력 때문이야. 넌 우리가 접촉하기 전부터 이미 ‘향’을 흘리고 있었어.”
“향?”
“재능 있는 신입이 풍기는—쉽게 말해 핏내 같은 거지. 저들은 그 냄새를 죽도록 싫어해.”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실루엣이 손끝을 튕겼다. 허공이 찢기듯 벌어지며 시커먼 불꽃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음마焔(음마엔)—마나를 부정(不淨)의 속성으로 뒤틀어 탄생시키는 흑마법 기류였다.
“엄폐!” 민지가 외쳤고, 지훈은 SUV 옆으로 구른 뒤 철제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불꽃줄기가 아스팔트를 스쳐 지나가자마자, 시멘트가 녹아내리듯 일그러졌다.
“저건… 일반 화염이 아니야.” 지훈은 마른침을 삼켰다.
“맞아. 저 녀석은 자기 마력을 독성 혼합해서, 피격 대상을 내부에서부터 태워.”
“…멋지군요.”
“감탄은 나중에 하고, 우선 살아남자!”
민지는 왼손을 곧게 뻗어 허공에 호를 그렸다. 따사로운 황금빛 선이 공중에 레일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그 위로 에테르 탄환이라 불리는 작고 빛나는 알갱이들이 순식간에 열두 발 배치됐다.
“사격 허가?”
“지금이야!”
민지가 손을 튕기자, 탄환들이 연사로 빛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러나 상대는 손목을 살짝 비틀어 흐릿한 장벽을 펼쳤고, 열두 발 가운데 열 발이 ‘두두둑’ 무의미하게 파편화됐다.
피융—
남은 두 발이 장벽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어둠 속 남자를 스쳤다.
“큭…” 낮게 갈라진 신음 소리가 들렸다. 흑연처럼 검은 망토 자락이 찢겼다. 하지만 치명타는 아니었다.
지훈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주머니 속 폴리머 권총을 꺼내 들었다.
‘9mm로 될까?’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 시뮬레이션이 순식간에 튀어 올랐다. 대상이 인간이라면 두부(頭部), 마법사라면 집중력 유도 근육… 그는 총열을 살짝 틀어 상대의 왼쪽 어깨, 삼각근 부위에 초점을 맞췄다.
탕—!
소음기가 달려도 낮게 울리는 메탈릭 에코. 탄환은 정확히 어깨를 관통했지만, 문드러진 피가 아니라 검은 입자가 흘러나왔다.
“사람이… 아닙니다?”
“반(半)인형마(마리오네트)야. 혼을 분할해 박아 둔 일종의 ‘호스트’에 불과해.”
“…그럼 본체는 따로?”
“그렇지. 그래서 저놈은 죽여도 의미가 없어. 대신 우릴 테스트하러 왔다고 보는 편이 나아.”
검은 불꽃이 다시 한 번 타올랐다. 이번엔 궤적이 비틀거리며 지그재그로 내달아왔다. 명중이 아니라 포위가 목적이었다. 지훈과 민지의 후방, 좌우측에 불길이 박혀 도로를 가로지르자,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사라졌다.
“경사님, 이제 확인 사살만 남았답니다.” 실루엣의 목소리는 기계처럼 건조했다. “아르카이아? 피난처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듣다 보니 우리도 꽤 유명한 모양이네.” 민지가 씁쓸히 웃었다.
지훈은 내심 시간을 재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지만, 수 년간의 특수훈련은 ‘두려움’과 ‘계산’을 정확히 구분하도록 그를 단련시켰다.
사선각, 15도. 드럼통—휘발유 잔존 40% 정도?
왼쪽 뒤편 공사장 울타리 안에 붉은 드럼통 두 개가 언뜻 보였다.
“저거, 화력 지원 가능합니까?” 지훈이 속삭였다.
“충분히.”
“그럼 제가 시선 끌게요.”
두 번째 섬광
지훈은 총열을 들어 올려 이번엔 상대의 가면을 겨눴다. 동시에 민지가 손끝으로 작은 ‘빛의 인장’을 그렸다.
탕! 탕! 두 발의 사격이 가면 코 부분을 스쳤다. 관통은 못 했지만 칩이 튀었다. 실루엣의 검은 시선이 본능적으로 지훈에게 쏠렸다. 바로 그때, 민지가 위에서 준비한 마력 표식이 검은 드럼통 위에 꽂혔다.
“Ignis Corona.”
민지의 낮고 또렷한 주문이 허공을 울렸다. 드럼통이 순식간에 백색 섬광으로 변했고, 뒤이어 콰아아앙!—발파 충격이 공터를 삼켰다. 화염기둥이 하늘로 솟구치는 찰나, 지훈은 민지를 잡아끌어 SUV 밑으로 몸을 뉘었다.
폭발이 가라앉기도 전에, 바람에 실려온 검은 잿가루가 그 자리에 흩날렸다. 실루엣이 있던 위치는 텅 빈 공허, 그 대신 시커먼 고드름처럼 변형된 마나 결정 하나가 맥박치고 있었다.
“호스트가 터졌다…” 민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 녀석, 생각보다 고급 품을 쓰네.”
지훈은 SUV 아래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이제 끝인가요?”
“아니, 이제 시작이야. 저 결정 속에 남은 ‘어귀(Port)’를 통해—”
그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나 결정이 팅 하고 깨지며 밤공기 속에 은은한 형상이 투영됐다. 검붉은 로브를 두른 노인의 형상, 그러나 실루엣은 노인을 모사한 최소한의 환영에 불과했다.
“아르카이아의 새끼들이여… 싸움판에 새 피를 끌어들이다니 재미있군.”
목소리만으로 공기가 깔렸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식은땀을 삼켰다. 적대감이 아니라 관측자의 냉담이었다.
“아쉽게도 네 ‘인형’은 부숴졌다. 전과도 없겠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시지?” 민지가 냉소를 띠었다.
“물러나지. 다만 증명은 됐다. 그 사내… 파동이 꽤나 선명하구나.” 노인의 형상은 지훈 쪽을 힐끗 바라봤다. “위대한 조율(調律)을 거스른 대가가 어떤지 곧 알게 되겠지.”
그 말과 함께 환영이 찢어지듯 흩어졌다. 암흑은 바람에 녹아 저 멀리 네온 불빛 속으로 사라졌다.
전투의 뒤안길
폭발 흔적에서 불씨를 끄며, 민지는 가볍게 손뼉을 몇 번 쳐서 마력 잔재를 날려 보냈다.
“내가 말했지? 세상이 두 겹이라고.”
지훈은 말없이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다, 손이 가늘게 떨리는 걸 깨달았다. 아직 전투 모드에서 ‘진동’을 꺼내지 못한 채였다.
“자, 진정 호흡.” 민지가 짧게 손목을 당겨 지훈의 등에 가볍게 손바닥을 대 주었다.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마나 진정술. 특공대 시절에도 심리안정을 위한 작은 요령들은 있었지만, 이런 식의 직접적인 완화는 처음이었다.
“이제 이해가 좀 돼요?”
“…감은 잡았습니다. 마법이 실재하고, 누군가는 그 힘을 독점하려 한다.”
“그래. 그리고 우리 ‘아르카이아’는 그 독점을 저지하는 독립세력이야.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고, 필요하면 국정원 신분도 도구일 뿐.”
“그리고 저는… 끌어들여졌다.”
“끌어들인 게 아니라, 보여 준 거지. 선택지는 여전히 당신 거야.”
지훈은 담배 연기를 멀리 내뱉었다. 머릿속에 과거 특공대에서 배웠던 ‘규범’이 한 장 한 장 찢기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가 찾던 ‘진짜 싸움’, 혹은 ‘쓰임새’라고 불렀던 무엇… 어쩌면 이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
“제가 들어가면, 무엇을 얻게 됩니까?”
민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SUV 트렁크에서 검은 방탄 케이스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매트 블랙 코팅의 차세대 하이브리드 소총과 각종 아티팩트 슬롯이 정갈히 놓여 있었다.
“네 감각에 맞춰 커스텀한 첫 장비. 미리 준비해 두었지.”
“…언제부터?”
“당신이 징계받던 날.”
지훈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결국 이 나라 시스템에서 필요 없던 놈이, 다른 무대에선 필요해지는 건가.”
“아르카이아에선, ‘필요 없는 사람’이란 없거든.”
그 말을 끝으로, 민지는 손목 단말기를 켜고 짧은 메시지를 전송했다.
<Recruit L-97, 승낙 대기>
지훈은 검지로 트리거 가드를 부드럽게 쓸었다.
“…해보죠. 대신 조건이 있어요.”
“말해 봐.”
“저를 여기까지 기어오게 만든 ‘그날’을, 언젠가 내 방식으로 매듭짓게 해 주세요.”
“특공대 건?”
“네. 내가 틀렸는지, 시스템이 틀렸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민지는 손을 내밀었다.
“Deal.”
두 손이 맞닿는 순간, SUV 실내등이 번쩍이며 꺼졌다. 이지훈의 새로운 헌터 코드가 빛의 각인으로 손등에 새겨졌다.
<코드네임: RAVEN>
3화 예고
신입 코드네임 ‘레이븐’은 아르카이아 본부로 향한다. 그곳엔 전 세계 마술전쟁을 지켜보는 눈, 그리고 예측 불가한 동료들이 기다린다. 한편, 지하에서 깨어나는 ‘위대한 조율(調律)’의 첫 조각은 이미 대한민국 수도권을 향해 이동 중인데… 새벽 도심, 첫 번째 ‘각성자’가 폭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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