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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븐: 광휘의 종언

1화 - 불청객

by 낯선공간2019 2025.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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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불청객

“치익… 시에라 1 타깃 시야 확보.”
“위치 고수.”
“롸져.”

희뿌연 새벽 공기를 가르며 짧은 교신음이 이어졌다. 서울 관악구 남현동 복합빌딩 옥상, 특수요원 이지훈은 장전된 M110의 볼트를 살짝 당겼다 놓았다. 바람 방향, 습도, 거리, 표적의 맥박까지 오랜 훈련으로 체화된 계산이 머릿속에서 빛처럼 튀었다. 숨을 들이켠 뒤 아주 천천히 내쉬는 순간, 귓속 무전에 불길한 말이 스쳤다.

“치익… 누군가 타깃에 접근 중으로 보인다.”
“뭐? 어떤 새끼야? Alpha!
“우린 아닙니다.”
“Bravo?”
“브라보팀 스나이퍼 지훈입니다. …지훈이 뛰쳐나갔습니다.”

다음 순간, 지훈은 방아쇠를 당겼다. 광택 없는 탄피가 매캐한 화약 냄새와 함께 튀어 오르고, 빌딩 벽이 고막을 울리는 파열음 속에서 흔들렸다. 방탄 헬멧에 묻어 있던 미세먼지가 날아가며 시야가 더 또렷해졌다. 표적은 쓰러졌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시간 뒤, 경찰특공대 대장실.
“미친 새끼야, 너 때문에 인질이 둘이나 다쳤어! 지휘계통 안 따를 거면 네가 대장 하지 이 새끼야!”

대장의 목청은 벽시계가 덜컹거릴 만큼 컸다. 그러나 지훈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테러리스트가 인질을 죽일 순간이었습니다. 시에라 2가 보기엔 ‘이상 없음’이었지만, 제 위치에선 분명히 수상한 움직임이—”
“보고는 폼이야? 팀장한테 보고하고 지시받아야 할 거 아냐!”

지훈의 덤덤한 표정에 더 분노가 차오른 대장은, 끝내 징계위원회 소집을 명령했다. 결과는 가혹했다.
“인질들이 몇 다치긴 했으니, 사망은 없었다만… 이지훈 경사, 서울청 기동대 전보.”

그렇게 엘리트 요원(경위)에서 평범한 경찰(경사)로 강등된, 지훈의 색은 회색으로 바랬다.


6개월 후

퇴근 후 PC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비록 총성과 폭압적인 무전 대신 키보드 타건음이 지훈의 세계를 채웠지만, 쓰임새 없는 재능을 날카롭게 갈고닦기엔 FPS 게임만큼 손쉬운 판도 없었다. 클랜 ‘젤다’에서 ‘다크’를 닉네임으로 달고 나면, 현실의 부당함쯤은 화면 뒤로 가라앉았다.

“형님, 오늘은 젤다 클랜원이라면 알 거라던 분이 먼저 와서 기다리던데요?” 알바생 현중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했다.
“클랜원만 200명이 넘는데 누군데…?”
“닉네임이 민트라던데, 예쁘시더라고요.”

예쁘다니, 여자겠군. 지훈은 담담히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 모니터엔 분명 ‘젤다_민트’가 접속해 있었다. 온라인에서 몇 번 농담도 주고받았지만 실물은 처음이다. 언제나 그랬듯 첫 마디가 망설여졌다.

다크 지훈 님?” 먼저 말을 건 쪽은 그녀였다. 눈웃음만으로도 모니터 빛이 물러나는 듯했다.
“아… 네, 민트님.”
“놀라셨죠? 사실 제가 직접 찾아온 건—”

그녀는 말을 아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데서 얘기하긴 좀 그래서요. 차로 잠깐… 괜찮을까요?” 지훈이 주춤하자, 그녀는 조용히 지갑을 열어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국정원 요원 신분증. 금색 태극 문양이 희미하게 번뜩였다.

국정원?
‘내가 무슨 스파이도 아니고.’ 당황 속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무튼 사이비보단 나았다.

지훈은 알바에게 계산을 맡기고, 그녀가 앞장선 검은 SUV에 올랐다. 목적지는 아직 미완성인 가든5 뒤편, 밤이면 인적 드문 도로였다.


“국정원 직원도 게임은 하시는군요.” 서먹한 공기가 버거워 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지만 곧 이름을 바꿨다. “박민지 요원님.”
“그렇게 불러주셔도 돼요, 이지훈 경사님.”

경사? 아직 승진 서류가 반영 안 된 중앙 데이터까지 뒤진 걸까. 연구소 같은 시설을 스쳐 온 듯한 민지의 시선이 차창 너머에 잠시 머물렀다. 그녀가 담배를 권했다. 지훈은 예의를 지켜 받아 물고, 라이터에 불을 붙여 주는 그녀의 손끝을 힐끗 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마법—믿으십니까?”
“…갑자기요?” 지훈이 조소를 흘렸다.
“황당한 얘기라는 건 압니다.” 민지는 손바닥을 펼쳤다.

순간 미세한 빛이 선을 그리듯 피어오르더니, 거기 듀퐁 라이터 하나가 놓였다. 실제로 그녀가 쓰던 것과 모양도, 묵직한 무게도 같았다.

“마술…?” 지훈이 덜덜 손끝에 힘을 줬지만 라이터는 단단했다.
“가지세요. 방금 제 마력이 만든 ‘진짜’ 듀퐁입니다.”

믿기 어렵다면 더 보여주겠다는 듯, 그녀는 양손을 펼쳐 이번엔 캔커피 두 개를 꺼내 보였다. 차 안에 따스한 커피 향이 번졌다.

“이건… ‘속임수’ 수준이 아니네요.” 지훈이 천천히 의자를 뒤로 젖혔다. 맥박이 느릿느릿, 그러나 크게 뛰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민지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지가 판단해 움직이는 저격수. 규정보다 생존을 우선하는 냉정함. 무엇보다 잠재된 ‘감응 능력’. 우리에겐 그런 인재가 필요해요.”

지훈은 담배를 비집어 꺾었다. 꺼내 놓을 말이 많았지만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법이라니, 국정원이라니, 감응 능력이라니. 그는 억지로 중얼거렸다.
“…내가 할 일은 뭡니까?”
“먼저,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부터요.” 민지는 창밖 네온을 가리켰다. “인간 사회 바깥에서 빛과 어둠이 맞붙는 전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지훈의 디스플레이에 ‘경감 강경수’라는 이름이 떴다. 오래전 팀장이자, 그날 지훈의 보고를 묵살한 장본인. 전화를 받기도 전에,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조직은 ‘아르카이아’. 국제 무대에서 암암리에 활동하는 마술첩보국—국정원과는 다른, 더 깊은 곳입니다.”

커피 캔 뚜껑이 딸깍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가든5 뒤편 공터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지훈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로 바뀌었다. 누군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민지가 손목시계를 흘깃 보고 속삭였다. “저희 편이면 좋겠는데, 장담 못 하죠.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오늘부턴 세상이 두 겹으로 보이실 겁니다.”

지훈은 SUV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공터 맞은편 가로등 아래, 검은 실루엣이 총구를 겨눈 채 섰다. 옛날의 익숙한 전조—그러나 지금은 더 크고 낯선 어둠이 뒤따르고 있었다.


― 1화 끝 ―

다음 화 예고
캔커피에서 피어오른 은은한 광휘가 곧 총성으로 변한다. 지훈은 믿을 수 없는 현장에서 첫 ‘마법 전투’를 맞닥뜨리고, 아르카이아의 실체를 향한 문을 연다. 새로운 감각, 새로운 규칙. 그리고 오래전 그날의 총탄보다도 더 무거운 선택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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