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카운트다운 제로
본 화 분량: 약 6,100 자
현재 시각 / 기준점: 2025-06-07 (토) 00:00 KST
라그나 실드 잔여 카운트: 12 h 00 m 00 s
0. 한밤중의 번갯비
0 시 01 분.
서울역 고가도로 난간에서 첫 푸른 번개(Blue Surge) 가 도심을 갈랐다.
라그나 실드를 감싸던 전기 장막엔 작은 균열이 전구처럼 번졌다.
순간 전력소비량이 15 % 넘게 치솟자, 한전 관제는 ‘국지적 낙뢰’로 분류했지만 아르카이아 상층부는 알고 있었다.
“실드 내부 전압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치, 내부에 두 번째 심장이 생긴 꼴이야.”
06 하우스 깊숙한 워룸(작전실)에서, 로건 장 지부장은 노란 약통을 탁자에 털어놓았다.
딱딱 부딪히는 약 캡슐 소리가 초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1. 폰 히든 테스트 ― 배신자를 찾다
라그나 실드 구동 로직엔 총 다섯 개의 퍼미션 키가 있다.
· 로건(지휘) · 조하령(연구) · 민지(현장) · 스프링(통신) · 하운드(보안)
다섯 키 중 두 개 이상이 같은 순간 0.06 초 ‘버퍼링’에 빠지면 실드 전류가 순간 10 %씩 미끄러진다.
이 버퍼링을 역이용해 숨은 공작자(내통자) 가 키를 훔쳤다는 정황을 잡아내려는 것이 ‘폰 히든 테스트’였다.
00 시 30 분·본부 브리핑룸.
열다섯 개 체커 칩이 모니터에 표시되고, 각각에 무작위 키 ID가 배정된다.
10 초 간격으로 ‘가상 접근’을 던져 두 키가 충돌하면 화면이 붉게 깜빡인다.
붉은 깜빡임 두 번이면 단순 오류, 세 번 연속이면 누군가 일부러 ‘중복’ 키를 갖고 있다는 뜻.
“테스트 시작.”
― 00:31:10 1차 충돌(녹색)
― 00:31:40 2차 충돌(녹색)
― 00:32:10 3차 충돌(붉은색)
“카운트!” 스프링이 소리지르다시피 외쳤다.
이어진 4, 5, 6차 충돌도 모두 붉다.
민지가 머리를 감싸쥐고 무릎을 굽혔다.
“이 속도로면 60 분 안에 실드가 ‘어디서든’ 터져요.”
조하령은 조용히 숨을 들이키고 키 로그를 호출했다.
로그인 기록은 전부 정상. 누군가 백도어로 몰래 열고, 로그를 다시 ‘정상’으로 덮어쓰기 한 것이다.
로건이 이를 악물었다.
“배신자는 최소 우리 키 보유자, 혹은 키 서명 생성 알고리즘을 아는 기술팀 안.”
그의 목소리가 낮아질수록 워룸 온도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2. 민지의 기억 결손
동시에, 민지의 동조 후유증이 급격히 악화됐다.
생체스캔: α-파 감소, 시상(視床) 이상 과열.
“30 분 단위로 기억 블랭크가 생겨요. 방금 한 말을 금세 잊어버려.” 스코필드 진정술사가 보고했다.
레이븐이 민지 옆에 앉아 머리에 냉각패드를 대주었다.
“조금만 버티면 돼. 실드가 유지되면 붉은 비는 못 내려.”
민지는 희미하게 웃었지만, 시선 초점이 자주 떨렸다.
“레이븐… 아니, 지훈 씨. 혹시 기억 나? …우리가 처음 PC방에서 만났을 때, 라면 값 깎아 줬던 그 알바?”
“…현중이.”
“그래, 현중이… 그 애 이름이, 방금 전까지 기억 안 났어.”
민지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어. 그러니까, 라그나 실드 절대 깨지지 않게—”
하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민지의 시야가 깜박였고, 방금 전 “현중”이란 단어조차 잊은 듯 허공을 더듬었다.
레이븐은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등 각인의 파동이 민지에게 미세 진정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한 번당 20 분밖에 못 버틴다.
3. 노드 2개 동시 마비
새벽 02 시 04 분.
성수 B-노드와 은평 C-노드가 동시에 ‘침묵’으로 바뀌었다.
전류가 0.01 Ω 만큼 실드 외부로 새고, 실드 인테그리티가 85 %로 곤두박질쳤다.
워룸 전체에 경보등이 번쩍였다.
조하령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두 노드 영상을 띄웠다.
· 성수 철탑: 노란 작업 헬멧 하나가 탑 중간 난간에서 목이 없는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헬멧 안쪽엔 아르카이아 패치.
· 은평 맨홀: 붉은 결정 송진 같은 물질이 맨홀 뚜껑을 새빨갛게 덮고 있다.
스프링이 외쳤다.
“배신자는 현장에서 자폭하면서 실드를 안쪽에서 뒤집었어요!”
하운드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놈은 우리 패치까지 훔쳤단 말인가.”
로건은 결정을 내렸다.
“레이븐, 민지를 데리고 남대문으로 가라. 카시엘이 의식을 시작하려면, 반드시 중앙 전류를 끌어 써야 해.
남은 노드는 현장조 B가 맡는다. 우리는 남대문에서 끝장을 보겠다.”
4. 남대문, 붉은 비 제단
03 시 32 분.
남대문 앞 광장에 붉은 비 결정체가 장막처럼 내려앉았다.
고도 300 m 상공, 붉은 빛이 천막처럼 펼쳐져 눈에 보이는 모든 광원을 혈색으로 물들인다.
카시엘은 σ-플레이트를 허리에 차고, 거대한 붉은 원을 끌어당겨 거울처럼 매달았다.
“환영한다, 아르카이아.”
카시엘은 검은 로브를 벗어 던졌다. 은빛 머리카락, 새하얀 얼굴… 그리고 왼쪽 어깨에 푸른 번개 문양이 박혀 있었다.
“빛과 어둠을 갈라 놓은 건 사치였다. 오늘, 인간·마법·세계선을 한꺼번에 섞겠다.”
붉은 비가 낙하를 시작하자, 남대문부터 종로 세종대로까지 건물 벽이 푸른 번개로 뒤덮였다.
빗방울 크기의 붉은 결정이 공기 중에서 순간 얼음처럼 굳어, 지면에 닿는 순간 휩쓸리듯 번개로 변한다.
사람들은 빨간 비를 손으로 가리곤, 번개가 눈앞에서 갈라지는 초월 광경에 넋을 잃었다.
레이븐 팀이 도착했을 땐 이미 세 블록이 붉은 비로 젖었다.
민지는 번개를 보는 순간, 뒤통수 편두통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주저앉았다.
“도시 전체가… 숨 쉬는 거울이 돼버렸어.”
레이븐은 AR-X9을 거울 원 한가운데 겨눴다.
‘총알로 깨질까?’ 아니다. 붉은 비 결정은 마력 융합체.
그는 손등 각인을 바라봤다.
“문이 되라…”
그 순간, 흰 까마귀가 형체를 드러내더니, 파란 잉크로 공중에 룬선을 큼지막하게 그려냈다.
Co-Sync Protocol ω-Raven
조건: 인간-마나-거울 삼중 접속
효과: 거울면 역위상 180° + 붉은 비 결정 집단 정지
대가: 동조자 신체-정신 피드백 부하 92 %
레이븐은 민지를 바라봤다. 민지는 혀끝이 말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문이 돼. 나는… 열쇠가 되겠어.”
민지가 σ-플레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눈과 귀에서 피가 흘렀다.
σ-플레이트가 민지에게 응답하듯 파란 불꽃을 토해냈다.
카시엘이 외쳤다.
“그건 네가 가진다고 움직이지 않는다. 조율자의 혈통만—”
그때, 레이븐이 σ-플레이트로 달려드는 카시엘을 막아섰다.
나이프 대신, AR-X9 빈 탄창을 집어 카시엘 턱을 꿰렸다.
찰나의 틈!
민지는 붉은 원 한가운데 σ-플레이트를 박아 넣으며 마지막 주문을 토했다.
“Lumen hæc, orbem liget. Flamma hæc, pluviam sistat!”
5. 라그나 실드, 붕괴… 그리고 부활
카시엘이 괴성을 질렀다.
붉은 비 장벽이 산산이 갈라지며, 푸른 번개가 한 번 더 도시를 스쳤다.
마치 블루 서지가 붉은 비를 ‘씻어 내’ 면서 새벽빛이 비집고 내려왔다.
실드 모니터엔 Integrity 0 %
라는 참담한 숫자가 보였지만, 1 초 뒤 Re-alignment
막대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σ-플레이트가 실드 일부를 자기장 중심으로 바꿔, 아예 ‘붉은 비’를 흡수 재료 로 삼아버린 것이다.
0 % → 12 % → 28 % → 63 % → 100 %.
카시엘의 얼굴엔 경악과 기쁨이 섞인 미친 미소가 떠올랐다.
“완벽해! 호수와 바다가 뒤집힌다. 이제 네가 새 조율자인가!”
그러나 레이븐은 민지에게 몸을 기댄 채, 피칠갑이 된 손목으로 ‘검은 나이프’를 뽑았다.
“아니… 우리는 둘이서 하나.”
나이프 손잡이가 흰 까마귀 각인과 σ-플레이트를 동시에 꿰뚫자, 블루 서지가 중심으로 수렴해 불꽃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카시엘이 회오리에 빨려 들어가며 절규했다.
“이건… 네가 감당 못 해!”
레이븐은 민지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린… 이미 문과 열쇠가 됐어.”
6. 새벽, 눈부시도록 맑았다
06 시 05 분.
라그나 실드 로그: _재동기화 완료 • 붉은 비 결정 체내 흡수 • 블루 서지 잔류 전위 0 %.
서울 하늘은 마치 태풍 뒤 세탁된 유리창처럼 파랗고 투명했다.
남대문 광장엔 탄 냄새와 기절한 오더 잔당들만 널브러져 있었다.
민지는 그제야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라면 값 깎아 줬던 현중이… 나중에 또 가면 깎아 달라고 해야지.”
레이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또 까먹으면 어떡하지?”
“글쎄.” 민지가 중얼거렸다. “이젠 잊어도, 누군가 대신 기억해 주겠지.”
흰 까마귀가 공중에서 한 번 선회하더니, 붉은 기운이 완전히 가신 빈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 브리핑 채널에 마지막 메시지가 떴다.
< LaGNa-Shield ► Final Phase : S u n r i s e >
All nodes : Stable
Remaining Threat : 0.0 %
9화 예고
○ 라그나 실드의 완전 부활 이후, 카시엘은 사라졌는가?
○ σ-플레이트 동조로 얻은 새로운 조율 권한은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까.
○ 민지의 기억 결손이 예상보다 심각하게 진행되고, 레이븐은 ‘두 얼굴’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 그리고, 어딘가 모래폭풍 한가운데서 말을 걷어 차며 등장하는 낯선 인물…
라인 한가운데 선 빛과 어둠의 변주 ― 9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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